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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서공

전서공

 

여조(麗朝)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의 벼슬을 지낸 5세(五世)(諱) 원유(原儒)는 슬하(膝下)에 세 분의 자제(子弟)를 두니, 장자(長子)는 휘 렴(濂)으로 양정공파조(良靖公派祖)이며, 차자(次子)는 휘 자()로 전서공파조(典書公派祖)이며, 삼자(三子)는 휘 순(洵)으로 총제공파조(摠制公派祖)이다.

 

원유의 차자인 전서공 휘 자는 고려(高麗)에 벼슬을 하여 충성(忠誠)을 다하고, 문채(文彩가 밝으며 여러 악기(樂器)를 연주(演奏)하여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것과 같이 그 공업(功業)이 청사(靑史)에 응당(應當) 전(傳)할 만한데 비록 재상(宰相)의 반열(班列)인 이조전서(吏曹典書)에 있었으나 조선(朝鮮) 태조(太祖)가 등극(登極)하는 날을 당(當)하여 나라를 팔아 영화(榮華)를 구(求)하는 무리가 득세(得勢)하고 성인군자(聖人君子)는 써서 일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공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무리로 나아가 진양도호부사(晉陽都護府使)가 되었으나 포옹(圃翁)이 순절(殉節)함에 따라 나라에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 사직(辭職)하고 귀향(歸鄕)하여 망복지의[罔僕之義:조선의 신하(臣下)로 되지 않겠다는 의리(義理)]를 지키고 그 지조(志操)를 고상(高尙하게 하여 한가(閑暇)한 구름과 학(鶴)과 더불어 천석(泉石:물과 돌이 어우러진 자연의 경치)에서 세월(歲月)을 보내며,헌면[軒冕:높은 관리가 타던 초헌(?軒)과 머리에 쓰는 관(冠)]을 초개(草芥)와 같이 보며 도덕(道德)에 흡족(洽足)하게 하여 그 언행(言行)이 세상(世上)을 붙들어 가르치니, 이때에 간사(奸詐)한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서 세상(世上)에 말을 전하지 못하고 집에도 유적(遺蹟)이 없어졌다.

 

묘소는 경기도(京畿道) 양주시(楊州市) 광적면(廣積面) 우고리(遇古里) 가좌동(佳佐洞) 서록(西麓) 유좌(酉坐)이다. 임술(壬戌)1982년 경기도 지방고적지(地方古蹟地)로 지정(指定)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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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서공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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